술의 정의-알코올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의 총칭
              (주세법상 정의 : 알코올분 1도 이상의 음료)

술의 역사

  •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고구려의 주몽신화에서는 유화가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해모수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족국가시대에 영고·무천·동맹 등과 같은 제천의식 때에 춤추고 노래하며 술을 마시고 즐겼다 하니, 이때에 술을 빚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 술의 종류와 성격은 알 길이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황 11년도에 ‘지주’라는 말이 나오고,<위지> 동의전에서는 “고구려 사람은 발효식품을 잘 만든다” 고 하였으며, 중국의 유명한 곡아주의 전설에도 고구려 여인의 사연이 얽혀 있어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중국과 비슷한 수준의 술빚기가 발달되어 있었던 것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문헌만으로는 당시의 술 빚는 자세한 방법을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산둥반도를 무대로 하여 엮어진 <제민요술>에는 매우 자세한 술 빚기의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누룩의 형태는 떡누룩, 막누룩으로 불리는 병국과 낱알누룩인 산국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밀로 만들어지고 병국은 밀을 볶거나 찌거나, 날것 그대로를 섞는데, 그 방법과 섞는 비율에 따라 종류가 달라진다. 병국이 산국보다 많이 쓰이고, 이것을 물에 침지하여 이른바 주모를 만든다.
    술의 원료로 가장 많이 쓰고 있다. 제조법은 곡물과 누룩을 섞어서 단번에 숙성시키는 일이 많고, 술의 알코올 농도가 높지 않아 일단 숙성시킨 술밑을 걸러서 이를 물 대신 이용하여 다시 곡물과 누룩을 넣어 계속 발효시킨다.

  • 고려시대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에는 찹쌀이 없기에 멥쌀로 술을 빚는다”, “고려의 술은 맛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서민들은 맛이 박하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 잔치 때 마시는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짙으며 사람이 마셔도 별로 취하지 않는다.” 등으로 고려의 술을 평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고려에는 청주탁주예주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동국이상국지>의 시에 “발효된 술밑을 압착하여 맑은 청주를 얻는다”고 하였으니 <제민요술>처럼 압착한 청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는 양온서라는 부서를 두고 왕이 마시는 청주와 법주를 빚어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주가 들어오게 되었다. 소주를 타이나 인도네시아 서인도에서는 ‘아라크’, 원나라에서는 ‘아라길주’, 우리나라 개성에서는 ‘이락주’라 하였다. 고려를 지배한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할 계획 아래 개성과 경상북도 안동에 병참기지를 만들었고, 이 지역은 소주의 명산지가 되었다. 김진은 일본의 해안도둑을 막기 위하여 경상도에 와 있었는데 소주를 몹시 좋아하여 그 무리를 ‘소주도’라 불렀다고 한다.
    이리하여 소주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고려에는 특수주로서 포도주가 있었다.
    요즘 포도주는 포도즙을 효모로 발효시켜서 만들지만, 당시의 포도주는 누룩 밥 포도즙으로 빚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것은 끝내 이 땅의 전통주로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사시찬요초>에서는 보리 밀가루를 녹두즙과 여뀌와 더불어 반죽하여 잘 밟아서 ‘막누룩(떡누룩)’을 만들고 있다.
    누룩의 재료는 밀과 쌀이 주가 되고 녹두가 다음이며 보리는 드물다. 밀은 잘게 쪼갠 알갱이를 쓰고, 쌀은 곱게 가루내어 이용하고, 쌀 알갱이에 밀가루를 부착시킨 것도 있다. 재료 처리는 가볍게 찐 것도 있지만 거의 전부가 날 것을 쓰고 있다.
    누룩의 형태는 대부분 떡처럼 생긴 ‘막누룩’이지만, 일부는 쌀알갱이를 그대로 쓰는 ‘낱알누룩’(약10%)도 있다. 쌀누룩 낱알누룩은 우리 전통의 것이 아니고 일본의 것이라고 착각하지 쉽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런 누룩들도 다채롭게 쓰이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술은 우선 발효주와 증류주로 크게 나누어진다.
    순발효주 제조법을 <증보산림경제>를 통하여 정리하면 덧술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발효시키는 단양법이 순발효주 전체의 45%이며(주모를 쓰는 경우와 않는 경우 모두 포함), 덧술을 한번하는 이양법이 43%, 두 번 덧술하는 삼양법이 12%이다.
    탁주는 그 말의 개념이 매우 애매하다. 일반적으로 맑은 약주에 비하여 흐린 술을 통틀어 말한다. 쌀누룩이나 가루누룩을 써서 발효시킨 뻑뻑한 술밑까지 먹는 것이 순탁주이다. 약주에 향기를 주기 위하여 복숭아꽃 송화 송순 연잎 매화 동백 두견화등을 이용하는 가향주로는 도화주 송화주 송순주 하엽청 연엽양 두견주등이 있다. 약주를 빚을 때 약재를 미리 넣거나 만들어진 약주에 약재의 성분을 우려나는 재제주로는 자주 구기주 오가피주등 많은 종류가 있다.
    소주는 조선시대 접어들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는지’로 만들던 소주도 흙으로 된 고리와 구리로 된 고리를 이용하여 만들게 되었고, 서울 공덕리 같은 데서는 대량의 소주를 만들었으며, 고려 때부터 유명하였던 안동소주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 근대
    근대에 접어들면서 북부에는 중국의 소주가 들어오고, 1876년(고종13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에서 알코올이 수입되고, 일본의 탁주나 청주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청주는 상품명의 하나인 정종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졌다. 1900년대 접어들면서 맥주가 수입되었다.
    1909년 <주세법>이 발표되어 일본인보다 효율적으로 주세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술빚기에 가지가지로 통제를 하였다. 이에 따라 그토록 다채롭던 우리의 누룩이나 술은 매우 단순하게 규격화되면서 전통적인 술은 법적으로 점차 만들지 못하게 되었다.
    누룩은 ‘조국’과 ‘분국’의 둘로 통제되었고, 이것마저 1927년부터는 곡자제조회사에서 만들게 되어, 우리의 술은 단순화의 길을 더욱 치닫게 되었다. 조국은 밀을 세 조각 정도로 낸 그래도를 원료로 하여 만든 누룩으로서 탁주나 소주 만들기에 쓴다. 또 밀가루를 전부 걸러낸 밀기울만으로 누룩을 만들기도 한다. 한편 분국은 약주나 과하주 제조용으로서 밀가루만으로 만든 것으로 ‘백국’이라고 한다.
    이밖에 함경북도 등지에서는 귀리 피 호밀등을 술지게미와 섞어 누룩을 만드는 일이 있다. 거의 자가용으로 일부 쓰이지만 판매용은 전부가 밀로써 만들게 되었다.
    탁주를 만드는 방법은 곳에 따라 다르다. 이것을 크게 나누면 주모를 만들어 찹쌀 조곡 물을 버무려 10일 정도 발효시키는 것, 주모를 쓰지 않고 찹쌀 조곡 물로 버무려 10일정도 발효시키는 것, 주모를 쓰지 않고 멥쌀 조곡 물로 버무려 5~7일 발효시키는 것, 약주 찌꺼기나 일본식 청주찌꺼기에 물을 부어서 만드는 것 등이 있다.
    이들은 탁주술밑이나 술찌거기를 체 위애서 물을 부어 가면서 손바닥으로 문질러 짜낸다.
    소주고리에서 고아낸 소주는 값이 비싸다. 그런데 1897년경부터 주정(알코올)을 수입하여 이것을 재래의 소주에 섞어 물로 희석하여 마시게 되었다. 그 값이 매우 싸서 수요량이 늘어났다.
    일제치하에서는 일본식 청주제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한편 이 땅에 사탕무를 심어 당밀로 소주를 만든 기업이 실패함에 따라 고구마로 알코올을 만들게 되었다. 대만에서 값싼 알코올이 수입되자 소주는 알코올에다 재래소주를 20%정도 섞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1938년경부터 일본의 전쟁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심한 식량부족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술 원료인 쌀이 통제를 받게 되었고, 1940년부터 탁주 이외의 술은 배급제가 실시되었다. 탁주만은 농주로서 특혜를 받았고, 이에 따른 탁주의 밀주도 성행되었다.
  • 현대의 양조업
    광복 후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식량부족상태에서 해마다 외국의 양곡을 도입해야 했던 실정이었다. 따라서 쌀로 술을 빚을 형편이 못되었다. 쌀을 원료로 하던 막걸리와 약주도 1964년부터 쌀의 사용이 금지됨으로써 밀가루 80%, 옥수수 20% 외 도입양곡을 섞어 빚게 되었다. 잡곡으로 만든 것은 술잔에 따라 놓으면 위는 맑아지고 밑에 앙금이 생겨서 볼품과 맛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탁주 대신 소주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도 쌀 생산량이 늘어나 쌀이 남아돌게 되어 쌀 막걸리·쌀 약주를 만들게 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췌-